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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송인규 교수의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댓글에서 옮김

송인규 교수의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이라는 책에서 제사장 부분을 발췌하였읍니다.
(송인규 교수는 총신대 신대원, 미국 칼빈 신학교, SYRACUSE 대학교 신학, 변증학 Ph.D
평신도 신학의 핵심 정신을 지향하는 새시대 교회 목회자로 10년간 봉사했고, 현재는 
합동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음)


제사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사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고 부르는 예를 흔히 접할수 있었다.
특히 부흥회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초청강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호칭으로 불르기를 좋아 했다.
또 본교회의 목사들도 자신의 권위가 도전을 받든지 일사 불란한 위계질서가 삐그덕거린다 싶으면, “감히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을 대적하느냐?면서 자신의 위상를 이런 식을 드리대곤 했다.
결국 부흥 강사건 해당 교회 목사건 그 주장하는 바는 동일하다.
즉 그들이 구약에 등장하는 “제사장”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회자는 구약의 제사장 계층에 해당하고 일반 교우는 평범한 백성과 같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인가?”
사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주장한 “만인 제사장” 이론이 부분적으로는 이미 답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인 제사장 이론 만으로는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런 상홯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목회자와 구약의 제사장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1. 구약시대: 제사장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일반 백성과 두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이 일반 백성과 달랐다.
제사장의 효시인 아론은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에 의해 제사장이 되었고(히 5:4), 
그후에는 세습에 의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다시말해 구약시대 제사장이 되려면 레위 지파에 소속되어야 했고, 레위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후손으로 태어나야만 했다.(참고 출 40:15)
이처럼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제사장은 아예 신분에서 조차 일반
백성과 차이가 있었다.

둘째, 제사장들은 직분을 수행하는 기능면에서 일반 백성과 달랐다

(1)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는 기능(민 15:25)
(2) 백성을 축복하는 기능(민 6:23-26) (삼상 2:20-21)
(3) 백성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기능(삼상 7:9)
(4)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기능(신 33:8,10) (스 7:10-11)
(5) 백성에 대해 종교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기능(삼상 7:3) 




2. 신약시대: 만인 제사장론의 요체
신약시대로 접어들면서 제사 제도에는 총체적인 변화가 찾아 왔다.
대표적인 예가 로마서 12장 1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제사 제도에 이처럼 놀라운 변화가 찾아 왔단 말인가?
한마디로 답하자면 참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고 만인 제사장론의 요체가 담겨있다.
예수께서는 메시야중에 메시야요, 구약시대 인간 중보자들(제사장, 왕,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셨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의 참되고 진정한 제사장이시기도 한 것이다.

왜 그는 제사장으로 오셔야 했는가?
첫째 제사장이 자꾸 죽고 갈리기 때문에 제사직을 일사 분란하게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지 못하고 있었다.
(참고 히 7:23)

둘째 제물 또한 문제었다. 근본적으로 범죄의 주체는 인간인데 어떠해 짐승이 
대신 형벌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참고 히 10:1, 3-4)


이처럼 예수께서 멜시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구약
제사에서의 제사장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느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 7:24-25)

예수께서 이처럼 구약의 제사 제도를 보완하기위해 오셨고, 또 그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사 제도가 종언을 고했다는 증거는,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지성소로 통하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로 나뉜 사건에 반영되어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셨으므로 우리도 제사장이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셨으므로 우리도 제물이 되었으며,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때문에
이와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을 허락 받은 것이다.

3.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오늘날의 목회자
앞에서 나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 신분및 기능면에서 일반 백성과 차이가 남을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할 때 우리도 제사장이 되었음은 앞에서 밝힌바 있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적하게 하려하심이라.( 벧전 2:9)

그 하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계 1:5-6)

그렇다면 기능면에서는 어떠한가?
(1) 제사를 드리는 기능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느니라. (히 13:15-16)

(2) 복을 비는 기능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져 있다
너희을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4)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벧전 3:8-9)

(3) 중보기도를 하는 기능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다

살펴본대로 제사장의 세가지 기능, 즉 제사, 축복, 중보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허락되어 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기능과 종교적 리더쉽을 발휘하는 기능만 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결론: 따라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자신이 구약시대의 제사장처럼 일반 그리스도인과 신분
조차 다른 것처럼 잘못 생각하여 거들먹거려서는 안 된다.
또 자신만이 제사. 축복.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양 오해해서도 안된다.
단지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신앙적 지도력를 발휘하는 면에서는 경험을 쌓고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여 일반 그리스도인과 차별되어야하고, 이로써 다른 일반 그리스도인
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댓글 2개:

  1. 목사는 하나님이 심판한다?2011년 7월 26일 오전 1:55

    기독교 문제의 90퍼센트 이상은 사제들이나 목사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엉터리로 가르치거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목사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 성도가 목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 오직 목사를 위하여 기도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도의 잘못된 행실과 관련하여 일대일로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여 권고하게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마 18:15~17) 여기에서 목사는 예외인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딤전 5:19)고 말씀했다. 여기의 장로에는 목사가 포함된다. 두 세 증인이 있으면 송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은 목사에게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요구한다.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신자보다 더 수준 낮은 삶을 살면서 잘못에 대한 지적은 듣지 않으려고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면서 말이다.

    그러한 목사들이 모여서 끼리끼리 지내면서 서로 감싸고돈다. 그러면서 다른 신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모른다. 신과 그분의 말씀을 멸시하는 행태이다.

    목사를 포함하여 모든 신자는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잘못된 모습에 대해서는 기꺼이 지적과 책망을 받고 신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부터 계속적으로 들려진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는 이 글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그 생각과 행동을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역사에서의 잘못된 사고 곧 속임수가 통용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박창진 목사님 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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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감리교 신학....2011년 7월 26일 오후 2:59

    교인 개개인이 자기의 신학을 가지고 바로 서지않으면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분별이 없어지고 쉽게 동화되어 따라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몸을 담고있는 연합감리교회는 평교인 한분 한분이 자신의 신학을 갖도록 권장하며 개개인이 사역자로 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웨슬리 신학의 4대 원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만이 오직 진리이고 기독교의 전통의 믿고 따르고 개인의 신앙적 체험과 훈련된 이성으로 신앙과 세상을 비추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입니다.
    오래전에 네쉬빌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한인연합감리교 지도자 대회에서 강사로 나온 목사의 주제가 위의 신학을 어떻게 평교인들이 매일 매일의 삶에서 적용하며 살고 개인의 신학을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그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한 것인지, 교회의 전통과 비추어 문제가 없는 것인지, 내 신앙의 체험으로 경험한 것인지 그리고 차가운(교육된, 훈련된) 머리로 생각해도 일리가 있는 것인지 4가지 원리에 맞추어보고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지금 교회의 생기는 일들이 혹시 감정에 치우쳐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차분하게 풀어가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 편 가르기보다 되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우리가 믿는 잣대에 비추어 바라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닌지요.
    결국은 우리 개개인의 몫인 것 입니다. 성경에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한 곳에서는 너의 믿음을 보여봐라라고도 합니다. 믿음과 행동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지만 조금씩이라도 매듭이 풀렸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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