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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를 위한 가이드 10문 10답


개혁된 교회를 소망하는 실제적인 지침
입력 : 2006 03 24 () 13:35:44 / 최종편집 : 2006 03 24 () 16:38:59 [조회수 : 4011]
구교형
교회개혁실천연대에 일하다 보면 참으로 많은 분들이 교회의 문제를 싸가지고 와서 상담과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들이 문의하는 내용들은 교단·교회 규모와 위치 등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유형이 거의 몇 가지로 모아진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전에 막지 못하고 더 이상 봉합할 수 없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터지면 어제까지의 성도들이 서로 원수 되기가 허다하다그런데도 매번 이 지경이 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회 내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부재와 목회자(특히 담임목사)에 대한 신화화된 두려움이다. 이 글은 교회지도자들을 일방적으로 흠집내거나 분란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니다. 오직 교회가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할 정도가 되기 전에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 건강한 균형과 견제를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일념으로 드리는 조언이다.

이와 관련된 상담 및 문의 또는 반론을 언제든 환영한다.

1)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기능으로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를 말하지만, 교회의 존재 목적을 말한다면 사람들의 영적·실제적 필요에 적극 부응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단지 유지를 위한 유지는 교회의 본래 목적이 아닙니다. 존재하여 주님의 빛을 밝혀야하고 교회의 유지도 그 목적에 부합해야 합니다.
단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안도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지역과 이웃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교회는 지역민원센터를 자임할 수는 없지만 지역주민들의 정서와 상황을 밝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지역아동(청소년)공부방·쉼터·상설바자회매장 운영·결손가정 입양·교회당 시설 적극 개방·주차장 개방·장학금 지원 등 실질적인 나눔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한 뜻을 모아 지역교회들이 함께 연대하고 협력해나간다면 ‘나 홀로 깨끗한 교회’라는 교만도 극복하고 지금과 같이 부실한 노회·총회제도를 보완할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입니다.

2)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다”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교회와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흔히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다. 목사는 모든 성도들이 원한다고 해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목회적 권위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얼핏 들으면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지만 사실 이 말에는 엄청나게 잘못된 논리들이 많습니다.
첫째, 이 말 속에는 ‘목사만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할 수 있다’는 심각한 영적 교만이 숨어있습니다. 이처럼 목사가 강단에서, 또는 목회의 현장에서 기도하며 선포하는 모든 말들은 오류가 없다는 생각은 부패한 로마종교 시대의 교황 무오류설과 일맥상통합니다.
둘째, 이러한 논리는 부패한 자들의 자기 합리화 논리로 자주 이용되고 있습니다. 신본주의의 이름을 빌려 교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성도들은 그저 따라오라고만 강요하는 모습들은 아주 흔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심에 사로 잡혀 권위주의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에 엄중한 경고를 하며, 오직 성도들 앞에 본이 되어 자발적인 순종을 이끌어낼 것을 권고합니다(벧전 5 2, 3).
분명 교회가 단지 민주적 제도로 운영된다는 이유만으로 성경적인 교회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서 세상을 이끌어가시는 시대적 변천과정에 민감하다면, 지금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많은 경우 민주적 제도운영을 통해 일하신다고 말해서 틀린 바가 없을 것입니다. 모세의 예를 많이 들지만 지금 이 시대에 누가 모세와 같은 차별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나 직책이 있다고 할까요? 심지어 초대교회 사도들도 말씀선포와 기도하는 일 외에는 교회운영의 전반적인 원칙만 제시할 뿐 실질적 교회운영은 집사들이 맡아 진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중세로마교회에 저항하였던 종교개혁자들도 성경적 은사론에 근거하여 모든 성도들의 자기역할을 강조하며 교회 내에서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 하였습니다. 칼빈은 독재화된 교회제도를 이렇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로마 감독만이 교리를 판정하고 정의하며, 법을 제정하고, 규율을 세우고, 또한 재판을 하는 등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고의 재판권을 가졌다고 한다.…그러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무한한 권력을 악용할 때 그 정욕을 조절하거나 억제할 만한 재판권을 지상에 전혀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개혁자 칼빈과 그를 따르는 개혁주의 후예들은 교회 내적 민주적 제도뿐 아니라 독일과 영국·네덜란드·스코틀랜드·미국 등의 민주적 정치제도 확립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3)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성경적인 은사론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들은 성경원리에도 초대교회정신에도 종교개혁정신에도, 시대 조류에도 맞지 않게 담임목사와 몇몇 장로들의 전제정치를 신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국장로교회의 정치제도 중 당회는 명목상으로는 대의적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 같지만, 현재 우리의 현실에서는 당회원들만 결의하면 어떠한 잘못이 있어도 당회독주를 막을 장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당회는 개교회가 나가야 할 기본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입법기능에 성도들의 치리권을 갖는 사법기능, 게다가 자주 제직회를 대신해 중요한 사안에 대한 집행을 해나가기도 하니 행정기능까지 3권을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회가 결정하면 제직회나 공동의회 등 나머지 대의기구는 거수기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행정과 재정에 대한 사후감사기능마저 부실해 맘만 먹으면 어떠한 부정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성도들의 다양한 의견과 입장을 담을 수 있는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첫째는, 교회 내 정관(규칙)을 만들어 성도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교회운영을 보장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특히 담임목사를 비롯한 주요 직분자들이 성도들로부터 주기적인 재신임을 받아 책임 있는 목회를 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성도들의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청취할 수 있는 장이 되기 위해서 성별, 세대별 편차를 고려해서 교회운영 전반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열린 논의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의 민주성을 확립해나가는 일은 단순한 사회 개혁적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 개개인들에게 신앙양심을 주셔서 함께 고민하며 교회를 운영해나가도록 하셨다는 원칙을 환기시키는 교회개혁의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4) 교회는 성전이고, 목회자는 제사장입니까?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종교입니다(고후 5:16). 그러나 지금도 멀쩡한 간판과 경력을 갖고 있는 이른바 정통교회, 정통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약적(또는 유대교적) 집착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심한 경우가 바로 교회를 성전으로,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성()과 속()의 기계적 분리가 철폐된 후에는( 27:50, 51), 더 이상 어떠한 인간 중보자(: 구약 제사장)도 필요 없이 모든 성도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며( 10:19, 20), 그 어떤 건물이나 제도에 구애받음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4:21, 23, 24).
목회자는 다만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특별한 은사를 깨닫고 좀더 전문적으로 배워, 목회적 활동을 주무로 섬겨야 할 하나의 직분일 뿐입니다(고전 12:7~11, 4:11~12). 그러므로 목회자를 스스로 중보자라고 생각하면 이단임을 자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적 삶을 돕기 위한 주된 역할을 직업으로 택한 사역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직분이 다 그렇듯이 이 직분에도 목회자로서의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은사가 확인되지 않은 채 단지 신학교 나와 안수 받았다는 것만으로 성도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면, 스스로 삯꾼 목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그러므로 말 많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하게 맡지 못하게 하려고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공적 직분을 맡지 못하도록 특별히 유의했다”고 가르칩니다.
예배당 건물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 그 자체가 아니며, 다만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나 자신들이 사용하는 물품에 대해 귀중히 여긴다는 의미에서 예배당을 귀히 여기는 것은 옳으나 무슨 거룩한 구별의 의미로 신성시하는 것은 아직도 구약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건물 중심의 교회관을 갖고 있으면, 성도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목회자에게 자기 영적 생명줄을 의존하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목회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완벽하다는 말이 아님)에게 돌려야 할 존경은 우리의 당연한 도리입니다(딤전 5:17). 그것은 목회자의 신분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제 길을 가는데 있어서 목회자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5) 목회자는 과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인가요?
자주 듣는 말입니다. 특히 낯 뜨겁게도 목회자 스스로가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적인 의미라면 대답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의미로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그야말로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왕들( 9:8, 삼하 22:51), 제사장들( 16:32), 선지자들( 105:15)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일반 백성들과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특별한 신분이었고, 그 이름은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어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적인 메시야, 곧 기름부음 받은 자는 그때로 끝났고, 신약시대 이후는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목회자는 기름 붓는 절차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적인 의미라면 “틀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 말을 목사·장로·안수집사 등의 위임식 때 행하는 ‘안수’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정신에 의하면, 그 직분들이 사람의 선호도에 따라 함부로 세운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을 강조하는 엄숙한 위임절차라는 의미일 뿐이지, 안수로 세웠다(장립)고 해서 그 자체로 초월적인 은혜나, 배타적인 지위를 갖는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모두가 장립을 받았는데, 특히 목회자만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더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또 흔히 말하듯이 단지 목회자만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큰 의미로 본다면 하나님의 모든 일꾼들은 목회자뿐 아니라 모두가 다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뭔가 특별히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목회자만의 배타적인 기름부음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잘못된 전통임이 분명합니다. 위임의미를 갖는 상징적 절차일 뿐 목회자만의 특별권위를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6) 정말 목회자를 비방하면 하늘의 벌을 받습니까? 목회자가 저주하는 설교를 하면 정말 성도에게 벌이 임합니까?
목회자가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제멋대로 성도들에게 저주를 선포하고(저주설교), 입을 틀어막기 위해 특정인을 지명해서 대놓고 면박을 주는 설교(표적설교)는 대표적인 목회자 ‘탈선사례’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목사의 설교권 또는 강단권은 설교강단을 통해 목회자가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백지수표가 아닙니다. 정당한 목회자의 목회활동은 성실히 조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어긋난 가르침이나 정당하지 않은 지시 앞에서 성도들은 오직 진정한 하나님의 권위만 두려워하십시오.
목회자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말은 성경적, 교회사적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거짓말입니다. 특히 ‘목사를 거스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하는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과 아론 이야기( 12:1~10)는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기 상황으로 인용할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굳이 모세를 말하자면 저주를 퍼붓기는커녕 오히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장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가로 막은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모세였습니다( 32:30~32, 14:11~19).
사사건건 자신을 불평하는 백성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그는 한사코 포기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11:10~15), 한번도 백성들을 저주하지 않고 그 책임을 묵묵히 감당했기에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12:3). 이러한 모세의 자세는 본받지 않고 스스로 모세의 지위를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세와 가지신 특별함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12:6~8, 34:10~1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교회다움, 사회의 공의와 평화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설교는 하지 않으면서도 사사로운 이해관계와 정치적인 득실에 따라서는 멋대로 저주와 폭언, 폭력을 일삼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헌금 많이 바치면 축복받고, 인색하면 암 걸려 죽는다.” “목사에게 대항하면 죽는다, 망한다.” 제 맘에 맞는다고 복주고, 제 맘에 들지 않는다고 멋대로 저주를 선포하는 그런 목회자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언자라는 것들, 입에 먹을 것만 물려주면 만사 잘되어 간다고 떠들다가도 입에 아무것도 넣어주지 않으면 트집을 잡는구나! ( 3:5/공동번역). 근거 없는 저주설교는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옳지 않은 저주가 임하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목회자의 시선이 아니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입니다.

7) 목회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자격이 심히 의심스러울 때 성도들은 먼저 사실을 확인하고, 먼저 목회자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또 목회자의 문제를 제기할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인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때론 아주 주관적인 기준이나 느낌, 떠도는 풍문, 심지어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로 문제를 들추기도 하나 그것은 교회를 깨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교회를 지도하고 목회직을 수행하기 어려울 만큼의 심한 결함이 발견되었거나 확실시되는 때는 단호히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이럴 때 조차도 흔히 말하듯이 “적당히 은혜로 넘어가자”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또 문제를 인정하더라도 “목회자의 잘잘못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니 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는 말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비성경적인 거짓주장은 벌써 중세로마교회 때부터 성직자들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광범하게 확산되었던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교황의 말을 들어보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사람이 결정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 교구의 감독은 하나님 자신이 판단하시기로 보류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예속자들(일반 백성)의 행위는 우리가 판단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라고 쓰면서 그런 말들이 얼마나 파렴치한 변명에 불과한가를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문제들이 있을 때 우선 교회와 교단이 정한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당회→노회→총회). 그러나 상당한 경우 교단헌법의 모호성과 재판의 불공정성으로 인하여 정당한 판단을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대한민국이 정한 실정법의 틀 내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다양하게 의견을 제기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법을 어기거나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처음부터 무엇이 된다, 안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필요하면 보다 자세한 상담을 위해 교회개혁실천연대나 한국교회법률상담소 같은 기관에 문의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목회자를 함부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흔히 잘못을 범하듯이 담임목사 청빙시 한두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위임해주거나(:광성교회), 설교 몇 번 듣고서 결정하거나, 막연한 소문만으로 쉽게 정해서는 안 됩니다. 청빙을 원하는 교회는 교회 내 각 계층들(직분·세대·기관 등)을 대변할 수 있는 폭넓은 청빙위원회를 결성하고, 교회가 원하는 목회자의 청빙기준과 조건을 분명히 세워야 합니다.
청빙위원회는 복수의 칭빙후보를 놓고, 폭넓고 객관적인 평판·목회적 비전·교회상황들에 대한 종합적 대처능력·화합력·도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민주적 의사가 반영된 교회의 정관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약속이 중요합니다.

8) 아무리 억울해도 바울은 교회 일로 세상법정에 가지 말라고 권고한 것(고전 6:1~7)으로 알고 있는데, 사회법정에 호소하는 것은 비성경적인가요?
그 본문에서 분명 바울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으로(1차적으로) 성도들 사이에 사사롭게 일어날 수 있는 분쟁과 다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이 바로 그러한 성도들 쌍방 간의 다툼과 도덕적 품행에 대한 문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정신을 심각하게 해치고, 조직을 이용한 명백한 불법이 저질러졌을 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정당한 권위를 위임받은 공적인 사법기관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교회 내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단지 교인들끼리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니라, 반드시 경찰이 출동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세상법정에 가지 말라는 바울의 명령에는 세상법정에 맡기지 않아도 교회 내 좋은 제도나 인물로도 충분히 교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2, 5)이 바탕이 되고 있는데,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법부로 가지 않아도 교회 내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될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광성교회 사태 내내 백주대낮에 사람을 납치하고, 집단폭행해도 경찰이 바라보기만 했던 것은 ‘교회 내 문제’, ‘종교의 자유’라는 말도 안 되는 ‘특수성(성역)’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비리를 가리기 위해 교회의 특수함을 말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고 포상함)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2~14, 16)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비리나 불법행위가 있을 때 대한민국 헌법과 사법부를 주신 하나님의 위임을 믿고 이에 호소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불가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가능한 조치를 다 취해보고도 가능성이 없을 때 세상법정에 호소하는 것은 여전히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9) 교회개혁을 하려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 분명한 문제가 있을 경우 뜻을 함께 하는 동역자들을 찾아 함께 합시다.
* 정말 교회개혁을 원한다면 도덕적 우위를 점해야 합니다. 폭언, 폭행, 거짓말 등으로 상대방에게 필요 없는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주님의 몸된 교회의 회복 이외에 어떠한 대가(재정적 이익, 교회 내 지위향상 등)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결국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여야 하며, 그럴 경우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선하신 우리 하나님께 최종 판결을 맡겨야 합니다(딤전 5:24, 25). 또 교회 분쟁으로 인하여 생겨날 수 있는 불신과 미움, 무엇보다 교회와 신앙에 대한 회의를 복음으로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혹시 현안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비슷한 문제들이 반복되기 쉬우며( 11:24~26), 성도들의 좋은 뜻이 제도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교회정관(규칙·규정) 제정, 특별 위원회 구성 등을 실시합시다. 이러한 진통을 통해 해당 교회와 한국교회가 도덕적, 제도적 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 교회 분쟁으로 인하여 생겨날 수 있는 직분자들에 대한 불신과 미움, 무엇보다 교회와 신앙에 대한 회의를 복음으로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0) 칼빈의 <기독교강요>(4)는 교회의 의미와 운영, 개혁 등에 실제적인 지침이 많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도움이 되는 부분을 소개해주세요.
“자신이 진실한 감독임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감독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기이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매우 엄격해서 사역자들은 누구나 주께서 요구하신 직분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조직된 정치를 교권제도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말을 부적당하다고 보며 또 분명히 이 말은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교회정치에 관한 문제에 관한 한 사람들이 주권이나 지배권을 꿈꾸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안디옥 회의에서는 장로들과 집사들 모르게 교회 일을 처리하는 감독들을 제한하도록 결정했다.
“교회 재산은 토지든 돈이든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의 저술에서 종종 발견한다.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그들이 자기 소유를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행위를 저지른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 재산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분배하되 마치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최대의 경외와 공경으로 편벽됨이 없이 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크리소스톰과 암부로시우스, 어거스틴 및 그들과 같은 감독들이 엄숙한 언명으로써 자기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직했다고 선언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신자들이 자신들의 감독을 택하는 자유는 오랫동안 보존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원하지 않는 감독이 강제로 직무를 맡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안디옥 회의에서는 신자들이 반대한 사람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금했다. 레오 1세는…‘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또는 그 대다수가 요청한 사람이 선택되게 하라. 모든 사람 위에 앉힐 사람은 모든 사람이 선택하게 하라.’…그래서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세계적 종교회의가 넥타리우스를 임명할 때 모든 성직자와 신도의 승인이 없이 임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어떤 감독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할 때에는 모든 교인들이 그것을 확인해야만 그 지명이 효력을 지녔다.

더 참고하실 만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 <기독교강요> 4(존 칼빈)
*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백종국/뉴스앤조이)
* <평신도 신학 1, 2>(송인규/홍성사)
*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폴 스티븐스/IVP)
* <장로교회는 없다>(황규학/에큐메니칼연구소)
* <생사를 건 교회개혁>(김동호/규장)
* 이글은 몇몇 사이트에 함께 기고했습니다. (필자 주)

구교형 /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댓글 5개:

  1. 미국교회>한국교회>한인이민교회순의 따라하기 악순환이 생산한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교회운영의 끝=목회자의 전횡.

    눈 크게 뜨고 정신 바짝차리고 지켜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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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동안 BLOG에서 읽었던 글중 최고입니다.
    이런 글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눈과 귀를 막고 맹목적으로 믿음생활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바른 신앙관을 정립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개혁에 동참하면 좋겠읍니다.
    우리 교회도 돌아 봅시다.
    교회지도자들(목사, 장로), 교회 행정, 사역등이 여기에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바꿔야지요
    길지도 않은 인생 샤마니즘 신앙에 예수님만 접목시켜놓고
    눈과 귀막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따라가시겠읍니까?

    어느날 "이게 아닌가벼." 할때는 돌아올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넜을 때일겁니다.
    바른 신앙을 회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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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말 제대로 정독하고 읽어야 하는 내용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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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운영자분께 부탁합니다
    이런글이 오른쪽에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운데 MAIN에 올려주시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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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후진적 전형이라고 하셨지만, 이민이란 절박한 현실 위에 세워진 특이한 유형이라 평가하고 접근하지 않는다면, 절대 해결 불가할 겁니다. 그저 같은 한국의 교회가 아니랍니다. 미국의 교회와도 비교 불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시고,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으세요. 정말 내가 생각하는것이 선한 것인지 오래 기도하시고... 위 교회 교인은 아니지만, 저도 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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